한500번은 웃은 것 같다.

청소년의 시각에서 보면,

사회라는게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보여준다.

 

 

샤를 보를레는 악의 꽃을 통해

사회가 속이다 썩어문들어진 사회도 경제가 유지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지만,

경제학의 원리라는것부터가 그냥 그런 인식구조인 경우의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도록 만드느냐의 것이다. 

 

 

다른 인식구조를 가지고, 서로 다른 공간에 있다.

 

잘 적응하지 못할 수 밖에 없었던건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아마 자퇴나 전학이라지만, 퇴사나 이직같은 느낌이었을 뿐.

흔히 말하는 사회적 낙인 처럼, 문제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부터 문제있다.

그럴 자격자체가 없으니 말이다.

 

일반적으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릴적의 인간성을 상실한 괴물로 전락해 가거나,

그런 사회에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방황하게 되는데에는, 너무 외부에 시각을 빼앗겼기때문이다.

외부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들을 보는 것이지만.

본래 청소년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보단, 외부에대해 보고 배우는 때니 말이다.

그게 뭐하나 보고 배울것없는 더러운 사회에서 청소년들의 방황이 숭고한 이유이다.

 

이런걸 보면 사회가 마냥 좋다고만 말하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가?

얼마나 사회가 더러우며,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가치가 있는지라던가를

제시하는 것이 훨씬 제대로된 교육이다.

물론 더러운 것을 제스스로 더럽다고 할 리는 없을 것이다.

상대에 대해 더럽다고는 하지만, 어떤점에서 그런제 제대로 말할리도 마찬가지지만.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는 그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어서,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다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일부러 추악해질이유는 없을 것 같지만.

추악한 본질을 방치하면 그럴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일제시대의 절망속에서

느낀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그당시가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를 볼 수 있으며,

얼마나 그것이 끝나길 갈망했는지를 알 수 있다.

 

 시에서 시의 대상은 은유로서 표현하려고 한다지만,

오히려 오감도의 시는 시적으로 은유해서 밖에 표할수 없는 직접적 대상에대해

은유를 통해 마음껏 표출하는 수단으로서, 비밀 편지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해가 13인것은 12명의 사도들과 배신으로 제명된 유다를 대신한 사도로

13=12+1 로서 볼 수 있다.

 

13인의 아해들이 폐쇄되어 갖혀있는 공간인 골목으로 돌진하고 있고

그 길의 앞은 막혀있다.

 

13인의 아해들중 많은 아해들은 무섭다고 한다.

하지만 오히려 무섭하게 하고 있는 아해역시

적반하장으로 무섭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다름아닌 친일파들)

12번째 아해에서 12의 아해도 무섭다고로 표현하고 있다.

*마치 유다가 거짓을 말하는 것과 같이

 

상황이 이렇다 보니 

차라리 무서워 하거나 무섭게 하는 그밖의 경우

(이상같은 제정신으로 산다는 것)는 없는 편이 나아보인달만큼

절망적이다.

 

 

무서운 아해여도 좋고

무서워하는 아해여도 좋다.

단지,

 

길이 뚫려있기만 하다면야,

13인의 아해가 돌진하지 않아도 좋다.

 

 

시인의 절규를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일제시대때 공공연히 신문에 실린 시에서.

 일단 공포심이 그들의 인식의 기본적인 방식이다.
그리고 무언가 피상적인 것으로
도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상이 물질적대상인 것이다.

사실 처음 보기에 자기 마음의 고민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상대가 신뢰하고 있는지로 생각할 수 있다.

넘어가는 경우는 대부분 이것때문에 넘어간다.

"어? 얘가 날 이렇게나 생각했던가."

친구로서의 거의 고백으로 여긴다는것.

 


하지만, 집단마다 서로 생각하는 세계자체가 다르단 것을 고려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신뢰할만하고 또 알아줬으면 하는 대상에게 드러내는 경우도 있지만.

하지만 반대로,

얘랑은 어떻게되건 상관없는 애라서 털어놓는 경우가 있다는 것.

 

?

그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싶지만,

둘은 워낙에 서로 상극인지라, 이런 두가지 경우가 있다는 것만 알고있다면,

너무나 구분하기 쉽다.

 

후자라면, 상대는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 헤어지고 자시고 할것도 없다. 원래 아무관계도 아니었던것.

그런 상대가 걱정하는 것은 관계가 끊어졌다는게 아니라,

자기가 한 말을 어디가서 퍼트리지 않을까 그것만 걱정한다.

 


따라서,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우리도 서로의 감정쓰레기통인건 아닐까? 라고 걱정할 수 있지만,

이런 관점에서 구분해보면 된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면,

간단한 실험으로 확인 가능하다.

 

상대가 나에게 감정을 털어놓을때,

"오늘 좀 피곤해서 말하기 힘들것같다.

내일 몇시쯤 연락해 보는게 어때?" 라고 했을때의 반응정도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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