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대에게 신경쓰게 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상대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상대 자체가 아니다.

인식의 주체인 자신의 상대에 대한 인식의 방식이 자신이 인식 한 상대인것이다.

 

 그렇기에 꼭 실질적 대상으로서의 상대가 있지 않더라도,

인식적 대상으로서의 상대는 이미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여러부류의 대상들이 이미 정리해 두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 저런 부류의 사람 등등으로 정리가 가능한 것이 일반적이다.

 

2.

 당장의 소통과 관계가 어떻다고 해서 그렇게 단정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똑같은 부류의 사람들간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여러가지의 관계의 형태를 가진다.

 

3.

먼저는 인식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경쓰기를 꺼려지는대상 

어떤 부류인지 알아 갈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관계는 적정한 수준에서만 유지하고자 하는 대상인경우.

 

4.

 하지만 이는 실질적인 적용과 활용에 있어서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아마도 이걸 정말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며,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능력이며,

좁은 인식의 틀에 갖혀 살기를 거부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갖게되는 일반적인 능력이다.

하지만 그러기위해서는 단련이 필요로 하며,

따라서 이러한 인식의 방식을 갖추지 못한 이들에게 이를 당장 해낼 수 있길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크다. 우산 상대가 그렇게 생각하기를 추구해야 하며, 추구하고서도 그렇게 생각하는데에

충분한 단련이 필요로하게 된다.

 

5.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한국사회의 관계라는 것들이 얼마나

허무하고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지 그야말로 속세나 말세라고 보는 것과 어울린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종교와 신앙을 추구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면, 그만큼 아름답고 절대적인 무언가에대해서 얼핏보게 되는 감을 가지게 되기때문이다.

자심이 그토록 누군가를 사랑했더라도, 그 사랑이 알고보면 진리에 비해서

아주 단편적인 조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되기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사랑한다는 것은 무언가 무한한 사랑을 이미 전제하고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랑을 이루어가는 과정일 수 밖에 없다는 것.

 

대개 현실의 부정이라는 것은 영원에 대한 추구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아치 이미 존재하는 정신적 세계의 어떤 문을 통과하는 것과 유사할만큼 그 구조자체가 그렇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따라오는 점이다. 절대적인줄 알았지만, 현실은 유한했다는 것

 

그리고 현실의 관계라는 것은 어렴풋이 있는 것도 모호한 것도 아닌,

현실에 존재 하는 실존적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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